"왜 도심 한복판, 그것도 한남동 골목에 FEZH라는 공간을 짓게 되었을까." 이 글은 그 흥미로운 질문에서 출발한 90분간의 기록이다. FEZH를 직접 설계한 유이화 건축가가 모더레이터로 나서, 건축주인 임종현 대표와 마주 앉아 프로젝트의 깊은 이면을 조명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건축물이 땅 위에 단단히 서기까지, 두 사람이 나눈 치열한 생각과 경험 그리고 공간 너머의 철학을 차분히 따라가 보았다.
이날 행사의 진행자이자 공간을 설계한 유이화 건축가의 오프닝 멘트다. 보통 건축주가 건축가를 찾아오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은 정해져 있다. "몇 평까지 지을 수 있나요? 임대 수익을 올리려면 몇 층까지 올려야 하죠?"
하지만 한남동의 비좁은 골목에 건물을 올리려던 한 건축주의 첫마디는 달랐다. "한남동에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이 독특한 제안에서 출발한 공간, 한남동 '페즈(FEZH)'의 탄생 비하인드를 건축주 임종현 대표와 유이화 건축가의 대담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건축주 임종현 대표는 마케팅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경험한 세계 곳곳의 라이프스타일과 공간의 매력을 한남동에 이식하고자 했다. 페즈의 뼈대가 된 네 도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도쿄 다이칸야마 'T-site (츠타야 서점)'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공간. 마스다 무네아키 회장의 철학이 담긴 이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다. "물건이 아닌 이미지를 제공하고, 고객이 라이프스타일을 고르는 장소"라는 개념은 페즈 기획의 강력한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일본 버블시대의 주역이었던 단카이 세대, 즉 60대 시니어층을 타깃으로 그들의 깊이 있는 취향과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T-site의 공간 기획과 서비스는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공간의 표본이 되었다.
태국 방콕 통로 '더 커먼스 (theCommons)'로컬을 위한 열린 커뮤니티. 진행을 맡은 유이화 건축가는 기획 단계에서 건축주와 함께 직접 방콕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마주한 '더 커먼스'는 외지인을 위한 상업 시설이 아니라 철저히 동네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 몰이었다. 사람들이 사진만 찍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낮이든 밤이든 공간에 머물며 온전히 릴랙스(relax)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이 한남동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끌어당기는(invite) 오픈형 공간'의 이상향이었다.
모로코 '페즈(FEZ)'와 마라케시'페즈 FEZH'라는 이름은 1500년 역사를 지닌 모로코의 미로 도시 페즈에서 따왔다. 10채 정도마다 우물, 빵집, 목공소가 모여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그 단위가 평등하게 확장되는 유기적인 도시 구조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페즈의 블루 컬러는 이브 생로랑이 사랑했던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에서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마조렐 블루’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Bali)모든 존재 안에 신성이 있다고 믿는 힌두 문화와, 호주의 60~70년대 히피 문화가 섞여 누구에게나 미소 짓는 발리의 포용성.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이자 일상에서 물러나 온전히 나를 찾는 리트릿(retreat)의 경험이 더해져 페즈만의 힐링 스페이스가 구상되었다.
건축주가 품고 온 방대한 영감을 146평 남짓한 한남동의 좁은 대지 위에 현실화하는 것은 유이화 건축가의 몫이었다. 주차 대수, 용적률, 좁은 골목이라는 물리적 한계 속에서 건축가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공간을 꽉 채우는 대신 전면에 과감하게 '보이드(Void)'를 만들며 비워냈다. 그 빈 공간은 사람들의 행위와 감성으로 채워진다. 또한 전면부에 곡선(웨이브) 디자인을 적용해 딱딱한 도심 속에 유연함을 불어넣었다.
시간성과 배려를 담은 디테일건축의 물성 또한 치밀하게 계산되었다. 유이화 건축가는 공간의 입자 하나하나까지 직접 체크했다. 차가운 느낌을 지우기 위해 벽에는 텍스처가 강한 거친 벽돌을, 바닥에는 같은 소재지만 매끄러운 텍스처를 적용해 변주를 주었다.
방문객이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의 천장 목재 역시 가공되지 않은 '생짜' 느낌을 피하기 위해 한 번 태워낸 탄화목을 사용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시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특히 외부 파사드의 브릭 루버(brick louver)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맞은편 다가구 주택 거주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내부의 빛과 시선을 한 번 걸러주는 '소프트한 경계'로서 건축가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건축주는 단 하나의 시안만 보고 단번에 승낙 했다고 한다.
단 하나의 설계안, 건축가의 고집과 철학대담 중 "비전이 맞지 않는 건축주의 요청은 거절하느냐"는 한 청중의 질문에 유이화 건축가는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그녀는 계약 전에는 절대 스케치를 보여주지 않으며, 계약 후 치열한 고민 끝에 '단 하나의 설계안'만을 제시한다고 한다.
건물뿐 아니라 주변 대지, 사람, 도시의 맥락까지 고려한 최선의 답이기에 두 개, 세 개의 대안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학적 조형성과 건축주의 현실적 니즈(기능성, 운영)가 충돌할 때는 논리를 바탕으로 끝까지 설득하는 것. 그것이 건축가의 몫이자 책임이라는 설명이다.
이상적인 청사진에도 현실의 벽은 존재했다. 페즈의 광장과 같은 오픈 공간에게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은 뼈아픈 한계였다. 한여름 무더위 속의 재즈 공연,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는 공간 운영의 큰 숙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페즈는 계절에 맞는 실내 행사와 콘텐츠를 끈질기게 기획하며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수익성 측면은 어떨까. 단기적인 임대 수익을 좇았다면 대기업 프랜차이즈를 입점시키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쉬운 길이다. 하지만 임종현 대표는 과거 가로수길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는 커뮤니티 중심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수익보다 브랜드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임 대표는 "중국에서는 비즈니스 모델의 손익분기점(BEP)을 적어도 6년 이상으로 잡지만, 한국은 당장의 이익을 원해 그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모두가 트렌드를 빠르게 따라가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결국 깊이 없이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장의 금전적 이익보다 이 공간이 어떤 경험을 줄 것인지, 어떤 문화적 결을 가진 샵들이 들어와야 할지를 3년 전부터 고민해왔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고, 이 공간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이고, 결국 그 가치를 알아본 브랜드가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 페즈는 커뮤니티 속에서 서서히 길들여지는 긴 호흡을 선택했다.
훌륭한 공간은 맹목적인 자본만으로는 탄생하지 않는다. 공간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내하는 건축주, 그 이상을 현실의 단단한 물성과 섬세한 디테일로 번역해내는 건축가, 그리고 그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이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좁은 골목 한편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색과 온도를 지켜내고 있는 페즈. 앞으로 한남동에 어떤 새로운 커뮤니티의 물결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이유다.
글. 정리 :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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