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남동 골목을 걷다 보면 조금 낯선 건물을 만난다. 대형 전광판도, 거대한 브랜드 로고도 없다. 대신 켜켜이 쌓은 벽돌과 나무, 빛과 바람이 공간을 채운다. 아래로 내려가면 물소리가 들리고 한쪽에서는 커피를 마신다. 재즈가 흐르고 다양한 전시가 열리며, 위층에서는 요가와 명상이 이어진다.
바로 2024년 문을 연 FEZH(페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을 기획한 회사가 마케팅 회사라는 점이다. 디지털다임(digitalDigm)은 삼성자산운용, SK텔레콤, 써브웨이, 재규어랜드로버, 한컴 등 국내외 브랜드의 디지털 마케팅과 온·오프라인 경험을 만들어온 기업이다.
한남동 FEZH(페즈)
디지털을 주로 다뤄온 회사가 가장 아날로그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디지털다임 임종현 대표에게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선택이 아니다. FEZH는 디지털에서 공간으로 방향을 바꾼 신사업이라기보다 디지털다임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경험을 물리적인 장소에 구현한 결과다.
이 공간이 던지는 질문은 AI가 범람하는 시대에 브랜드가 어떻게 고객에게 다가갈 것인가에 있다. 임 대표가 내놓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브랜드와 단절된 관계의 회복’이다.
FEZH의 시작에는 코로나19를 전후로 달라진 업무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디지털다임은 팬데믹 이전부터 디지털 노마드 근무를 시도하며 국내뿐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진행했다. 해외 부동산 광고·마케팅을 경험했고, 제주를 비롯해 베트남 호치민, 태국 방콕과 후아힌 등에서는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거점도 운영했다.
코로나19 이후 한남동 사옥의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한때 70~80명이 출근하던 사무실의 실제 출근 인원이 20% 이하로 줄면서 매일 같은 시간에 직원들이 모여 일하는 장소라는 전통적인 ‘오피스’의 개념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옥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할 이유가 있는지 고민하던 임 대표는 직원들의 업무 공간을 넘어 사람들이 쉬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오피스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회사에서만 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이곳이 예전과 같은 개념의 사옥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쉬고 만나고 경험하는 곳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고민 끝에 기존 사옥을 새로 짓거나 단순한 업무 공간으로 유지하는 대신 존재 이유부터 다시 설계했다. 직원 중심의 폐쇄적인 오피스에 지역 주민과 브랜드, 크리에이터가 함께 머물 수 있는 기능을 더하면서 지금의 FEZH, ‘한남동 안의 작은 도시’가 탄생했다.
FEZH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두 단어는 임 대표가 강조하는 ‘힐링’과 ‘커뮤니티’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극보다 쉼과 회복을 위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그가 자주 찾았던 태국 방콕의 커뮤니티 공간 ‘더 커먼스(The Commons)’에서 받은 영감이 더해졌다. 쇼핑몰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모으기보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커뮤니티를 먼저 형성하고 그 안에 브랜드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구조를 FEZH에도 적용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문했는가보다 한 번 찾은 사람이 다시 오고 싶은가를 운영의 기준으로 삼았다.
대규모 유동인구를 기반으로 짧은 기간 최대한 많은 방문자를 모으는 팝업스토어와 달리 한남동에 이미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고 코어 타깃에 맞춰 공간과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임 대표는 “성수와 한남은 결이 다르다”며 한남동을 주민과 직장인, 외국인, BTS 같은 아티스트가 섞여 생활하는 지역으로 바라봤고, 불특정 다수의 트래픽을 만드는 것보다 이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는 쪽을 택했다.
FEZH·블루캣
마케팅 회사가 만든 공간에서 ‘트래픽’보다 ‘관계’를 먼저 이야기하는 배경에는 AI로 디지털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늘어날수록 사람과 사람이 실제 장소에서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의 가치가 커질 것이라는 판단도 깔려 있다. 이런 생각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모티브가 된 곳이 모로코의 고도 페즈(Fes)였다.
임 대표가 방문했던 페즈는 거대한 계획도시와 달리 좁은 골목을 따라 집과 상점, 생활시설이 촘촘하게 얽혀 작은 생활 단위들이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 모습을 한남동에 구현하면서 ‘Fes’에 ‘Healing’과 ‘Hannam’을 상징하는 ‘H’를 더해 ‘FEZH’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건물 내부도 여러 기능이 층층이 모인 작은 도시처럼 구성했다. 4층 까사델아구아에서는 요가와 명상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보텍스 갤러리는 전시와 브랜드 행사의 무대가 되며, 블루캣에서는 음악과 책, 재즈를 즐길 수 있다. 지하 D-Square에는 카페와 광장, 마켓을 배치했다.
FEZH·4층 테라스
공간마다 하나의 기능을 정해두기보다 전시장이 다른 프로그램의 무대가 되고 광장에서 공연이 열리거나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아티스트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이용하는 사람과 콘텐츠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도록 했다. 임 대표가 FEZH를 “한남동 안에 또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구상은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오고 머물며 서로 만나고 이동하는지를 중심으로 한 건축 설계에도 반영됐다.
설계를 맡은 유이화 건축가는 건물의 조형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사람의 움직임과 머무는 방식을 공간에 담아 쉬라는 안내문이 없어도 잠시 앉고, 공연장이 아닌 광장에서 누군가 연주를 시작할 수 있도록 여러 가능성을 열어뒀다. FEZH는 이 같은 공간 설계로 2026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하며 ‘도시 안의 작은 도시’라는 개념을 건축과 프로그램, 사람의 움직임으로 구현했다.
사람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설계한 공간은 운영 단계에서 데이터와 기술을 활용해 더욱 세밀하게 조정된다. 방문자와 주변 유동인구의 시간대별 움직임을 분석하고 조명과 음향 등 일부 설비를 디지털 기술로 제어하며, 여기서 쌓인 데이터는 프로그램 기획과 고객 분석, 콘텐츠 제작에 활용한다. 다만 방문자가 기술 자체를 경험하게 하기보다 공간에서 필요한 순간 자연스럽게 작동하도록 녹여내면서, 아날로그적인 공간의 분위기와 디지털 기반의 운영을 함께 가져간다.
FEZH·까사델아구아
대관과 운영 과정에서도 방문자 분석과 히트맵, 전환율, A/B 테스트 등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며, 현장에서 쌓인 정보는 AI 분석을 거쳐 프로그램과 콘텐츠, 마케팅 전략을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 이처럼 데이터와 AI가 공간 운영의 뒤편에서 움직이는 것과 달리 방문자가 FEZH에서 보내는 시간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거나 사색하고,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는 아날로그적인 경험으로 채워진다. 임 대표가 말하는 ‘임베디드 테크놀로지(Embedded Technology)’ 역시 기술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사람이 공간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지를 뒷받침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공간 운영은 브랜드와 고객이 만나는 방식에도 반영돼 볼보, 피아제, 로에베, 엘르, 알로, On, LG유플러스 등 다양한 기업이 FEZH에서 고객을 만났다. 일반적인 팝업스토어가 짧은 기간 많은 방문객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면, 이곳에서는 핵심 고객이 공간에 오래 머물며 제품과 콘텐츠를 충분히 경험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본다.
“브랜드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불러모을 필요는 없습니다. 브랜드의 핵심 고객 중에서 취향이 분명한 사람들을 초청해 더 심도 깊은 경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관없는 수만 명이 행사장을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수십 명의 핵심 고객이 브랜드와 몇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제품을 보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커피를 마시고 음악과 전시를 즐기는 시간을 만든다. 각각의 경험이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제품이나 광고를 한 번 노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머무는 시간 전체가 브랜드를 경험하는 과정이 되며, FEZH도 단순한 대관보다 브랜드의 세계관을 실제 공간에서 고객과 공유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이러한 접근은 AI 확산으로 광고·마케팅 환경이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미지와 카피, 영상 제작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AI 활용 영역이 넓어지면서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은 줄고 생산량은 빠르게 늘어났으며, 누구나 짧은 시간에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 콘텐츠만으로 브랜드의 차이를 만드는 일도 한층 어려워졌다.
그만큼 온라인에서 고객의 관심을 만든 뒤 실제 공간에서 브랜드를 경험하게 하고, 현장에서 발생한 행동 데이터를 다시 콘텐츠와 CRM, 다음 프로그램에 활용하는 과정이 중요해진다. 과거 O2O가 온라인 고객을 오프라인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서로 활용하면서 한 번의 방문 이후에도 고객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기업 브랜드에서 시작한 연결은 아티스트와 프리랜서, 크리에이터, 스타트업으로 확장된다. 임 대표가 생각하는 크리에이터의 범위도 넓어 요가 강사가 자신의 클래스를 기획하고 명상 전문가가 프로그램을 만들며, 작가는 북토크를 열고 디자이너와 재즈 뮤지션은 전시와 공연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각자의 전문성과 콘텐츠를 펼칠 장소와 기회를 제공하면서 기업과 크리에이터, 공간과 브랜드가 만나 새로운 프로그램과 협업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과 콘텐츠가 모이고 관계가 쌓이며 FEZH의 커뮤니티를 채워간다.
FEZH 입구에 적힌 ‘Be Gentle with the Earth.’는 이러한 공간의 철학을 담은 문장이다. 여기서 Earth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부터 인간의 몸과 반려동물, 이웃, 함께 일하는 동료까지 주변의 다양한 존재를 아우르며, 자신을 둘러싼 존재를 존중하고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자는 의미를 담는다.
FEZH 야경
이러한 철학은 AI 시대에 공간의 역할을 바라보는 임 대표의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인터넷이 확산되던 시기에는 사람을 온라인으로 데려오는 방법을 고민했고, 스마트폰 시대에는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 안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가 중요한 지표가 됐다. AI가 이미지와 영상, 텍스트를 빠르게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이 접하는 화면과 콘텐츠의 양도 크게 늘었다. 이런 환경에서 임 대표는 직접 공간을 걷고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에 주목했다. 사람을 화면 안에 오래 붙잡아두기보다 실제 장소에서 만나 브랜드와 문화를 경험하도록 했고, 디지털 기술이 일상의 많은 부분을 대신할수록 같은 장소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의 가치도 커진다고 봤다.
FEZH는 방문자 숫자를 늘리기보다 사람들이 여러 번 찾아와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는 공간을 지향한다. AI와 데이터는 공간 운영과 고객 분석에 활용하고, 사람과 콘텐츠, 브랜드가 그 안을 채운다. 한 번 방문하고 잊히는 ‘핫플레이스’보다 다시 찾고 싶은 ‘아지트’를 만든다.
AI가 더 많은 것을 만들고 대신하는 시대에도 공간의 중심에는 사람이 남는다. 어디에서 만나고 무엇을 함께 경험하며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임종현 대표는 한남동에 만든 ‘도시 안의 도시’ FEZH를 통해 그 질문을 풀어간다.
*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은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며 스타트업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글.박종철 스타트업 전문기자
일시.2026년 8월 24일
출처.
「 AI 시대, 지구에 대한 존중을 공간에 담다…디지털다임 임종현 대표가 만든 ‘도시 안의 도시’ FEZH」